멕시코 이야기/멕시코시티

멕시코 멕시코시티

김 항덕 2020. 6. 27. 02:17

멕시코의 역사는 우리의 나라의 

역사만큼 많은 희생과 눈물의 역사인거 같다,
난 멕시코를 자주 가지만 카메라를 들고 가서 사진을 찍었던 것은 

이때가 처음 이였던거 같다
제2의 도시 과달라하라, 그리고 멕시코시티를 갔다 온 것은 

관광이 아니였고 일 때문이었다,

 

앵글로 아메리카가 영국계 이주민들이  

식민활동한 땅이라면 라틴아메리카는 이베리아 반도인들이 

건너가 정착한 곳이다


1808년 나폴레옹은 이베리아반도의 두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점령하고

그의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왕으로 앉혔다.
이런 유럽대륙의 변화는 오랜 기간

 스페인의 식민지로 있었던 라틴아메리카 여러나라가

독립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멕시코에서는 1810년 미겔 이달고 이 코스티야(Hidalgo y Costilla, Miguel /1753 ~ 1811)라는
종교지도자를 중심으로 

스페인 태생(peninsular)의 지배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혁명이 일어났다 


식민지 태생(Creole)인 이달고는 인디오와 메스티소 등 

다른 불만세력들을 규합, 노예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1810년 10월에는 10만의 대군을 모아 

멕시코시티를 공격, 본격적인 혁명운동을 일으켰지만
스페인 정부군에게 패배하고 

그 자신은 사로잡혔다가 이듬해인 1811년 3월에 총살 당함으로써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군대가 10만이라고는 하나 대부분이 

인디오(Indio)들이었고,

 훈련과 장비등 모든면에서 열세였기에,
8천명에 불과한 스페인정부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도중

 서부의 진주라고 불리는 과달라하라(Guadalajara)에 입성해서는
혁명정부를 조직했고, 노예해방과

 인디오들의 토지 회수를 선언하기도했다.
이달고의 뒤를 이어 

역시 크리올이면서 종교지도자 출신인 

모렐로스(Morelos y Pavon,Jose Maria / 1765 ~ 1815)라는

 인물이 이달고의 유지를 계승한다,


주로 멕시코 남부지역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멕시코시티 남서지역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승리를 거둔 모든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점차 게릴라전법에 의지하다가,
1813년 11월에는 

현 멕시코 게레로주의 주도(州都)인 

칠판싱고(Chilpancingo)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1814년 10월에는 의회를 소집해서 헌법을 제정, 전면적인 노예제도의 폐지 및 

대토지 소유제도의 폐지 등
이른바 평등헌범을 공포했다
그러나 의회는 안전을 위해 모렐로스가 이끄는 유목민 군대의 보호 아래
이리저리 옮겨다녀야 하는 고초를 겪다가 

1815년 12월,
모렐로스가 스페인군대에게 사로잡혀

 파문당한 뒤 반역죄로 총살당하고
그가 세운 혁명정부도 2년의 단명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과달라하라  시 입구
  이후 몇 년간은 이렇다 할 지도자 없이 주로 멕시코시티 남방에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투르비데(Iturbide, Agustin de / 1783 ~ 1824)라는 아주 교활(狡猾)한 사나이가 나타나
멕시코 혁명을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코자 했다.


이투르비데 역시 이달고나 

모렐로스와 같이 크리올(Creole)이라 불렀던

식민지태생의 백인(白人)이었지만,
1810년 이달고가

 멕시코혁명의 봉화를 올렸을 때
이 사내는 스페인 정부군 대령으로서 혁명군을 진압하여 공을 세웠고
1821년 모렐로스의 혁명정부까지 

타도하여 유능한 지휘관으로 지위를 굳혔다.
자신감에 도취된 이투르비데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신의 제국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우선 일단계로 게릴라의 지도자 

빈센트 게레로(Guerrero, Vicente / 1782 ~ 1831)를 만나
전향(轉向)을 선언한다,


멕시코에서 스페인세력을 축출하여 독립을 달성하고, 

가톨릭교회의 권리와 재산을 보호하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하면 스페인정부군의 지휘관으로서 게릴라전을 막아야 할 책임자가 

스페인정부를 배신하고,
그와 동시에 

그 게릴라들과 손잡고 독립을 하자는 것이다.
이런 폭탄적인 선언에 멕시코의

 일반인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획득한 이투르비데는
1821년 9월 멕시코를 해방하는데 

성공하여 멕시코시티에 입성했다.
그러나 그는 공화정이 아니라 제정(帝政)을 선포하고
1822년 의회가 자신에게

 독립멕시코 황제 "아구스틴 1세"라는 칭호를 바치도록 

온갖 공작(工作)을 다하여
결국은 멕시코 대통령이 아니라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그는 중앙아메리카의 합병을 선언하고, 

이를 정복해서 제국을 건설할 야심만 가졌을 뿐,
자신이 선언했던 사회개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속았던 멕시코 민심은 다시 그를 외면했고,

 공화주의자들의 반발은 더욱 심했다.
결국 산타 안나(Santa Anna, Antonio Lopez de / 1794 ~ 1876)와 

게레로(Guerrero,Vicente) 등이 지휘했던 반란군에 의해서
즉위 10개월 만에 황제자리도 빼았겼고, 

유럽으로 망명 길에 올랐다가 2년 후 몰래 귀국, 

반전을 시도했지만, 체포되어 1824년 총살당하고 말았다.


1794년 베라크루스주(州) 할라파에서

 스페인계 지주인 동시에 식민지 하급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산타 안나는 1810년 스페인 군대에 들어가 대위가 되었고, 
1821년에는 문제의 황제 이투르비데의 부하로서 함께

 멕시코 독립군으로 전향,
이투르비데를 황제로 추대하는데도 추방하는데도

톡톡히 제몫을 다한 매우 복잡한 인물이고
그와 함께 멕시코의 역사도 어지럽게 전개되었다.


1828년 멕시코의 독립운동가 

게레로(Guerrero, Vicente)가 산타 안나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까지 독립지도자들과는 달리 게레로는

 흑인의 피가 섞인 혼혈이고, 가계 또한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비록 독립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혁명군을 지도했지만
백인 우월주의(優越主義) 사회에서 흑인의 피가 섞인 그가

 대통령 직을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도 많았다.
결국 아나스타시오 부스만테라는 부통령의 반란으로 취임  수개월만에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 밖에 없었고
게레로의 뒤를이어 대통령이된 

부스만테에 의해서 1831년, 

결국 게레로도 총살로서 일생을 마감했다.


1829년에는 스페인이 다시 멕시코를 정복하기 

위해서 군대를 보냈을 때
산타 안나는 멕시코의 항구도시 탐피코(Tampico)에서 이를 물리치고 

국민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런 명성에 힘입어 

1833년 아나스타시오 부스만테를 몰아내고 대통령이 되었다.
연방주의를 표방하고 가톨릭 교회를 반대 했지만,

실제로 그가 구사한 국가권력은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였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인 1836년 텍사스에 거주하고 있던 

미국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통령 산타 안나가 

직접 원정을 떠났는데,
도중에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1836.3.2)는 소식을 들어야만 했다.

산타 안나가 이끄는 멕시코군대는

 앨러모(Battle of the Alamo)전투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텍사스 군대를 섬멸했지만,
이에 자극 받은 미국계 텍사스인들이 일치단결하여

산하신토 전투(Battle of San Jacinto)에서 멕시코군에게 승리했다. 


패배한 산타 안나는 4월 21일 샘 휴스턴에게 포로로 잡히는신세가 되어

미국 대통령 앤드루 잭슨과 면담하기 위해 

워싱턴 D. C.로 보내졌으며,
멕시코로 돌아왔을 때는 

사퇴 압력을 받아 대통령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행운이 아직은 그를 버리지 않았든지
1838년, 이번에는 프랑스 해군이

 베라크루스에 침입하자 이를 격퇴하여 인기를 만회할 수 있었고,
2년뒤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으나, 

1845년 다시 쫓겨나 망명길에 올랐다.



 

 

1846년 미국-멕시코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제임스 녹스 포크 대통령의 도움으로 귀국,
1847년 임시 대통령이 되어 

멕시코군을 지휘하였으나 각지의 전투에서 패전하고,
미국군에 의하여 멕시코시티에서 쫓겨났으며,
1848년 다시 자메이카로 망명.

 53년 귀국, 대통령에 취임, 55년 혁명으로 다시 실각한다


망명 길에 올라 쿠바· 베네수엘라·

 미국 등지를 전전하다가, 

1874년 멕시코시티로 돌아와 실의속에 죽었다.


독립이 잘못되면 오히려 주민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여타 지역도 독립을 했다고는 하지만, 

모든 주민에게 그 혜택이 돌아간 것은 아니고,
악몽같은 혼미가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멕시코 시티를 왔다,


 

 


 

 


 


 

 


 


 

 


 


 

 


 

멕시코 시티의 가장 중심격인 금융거리,
어김 없이 금,은 방들이 자리 잡았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소깔로 광장,,
소깔로 는 배꼽을  말한다,,
즉,소깔로 광장이라 함은 중앙광장이라 표현 하면 딱 맞는거 같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소깔로 광장,,


 

  

뒷쪽으로 두 명씩  타면서 소깔로 거리를 구경 시켜 주고 있는 관광 소형 차
  

  

  

   

   

소형 카메라를 이용해 작품을 생각 하며 한장 정확히 찍었음,,

집에 두고온 내 사랑하는 니콘 카메라가 생각 났는데

무거워서 두고 온것이 후회된곳,.멕시코   

거리의 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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