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민 이야기 16

대박난 샴푸 공장 그리고 결혼후 미국으로

파라과이에서 내가 살았던 시기는 83년도부터 91년도였지만 86년도와 88년도 두 번에 걸쳐 한국에서의 생활 약 2년 정도를 빼야 정확한 날짜가 나온다, 86년도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에 비로서 한국을 갈 수 있게 되었고 이후 88년도 2월에 한국을 가서 남은 학기를 마치고 졸업을 한다, ​ 졸업 후 당시 대 기업이었던 모 회사에 입사해 약 3달 정도를 회사생활을 한 후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온다,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오는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3달 정도 다닌 아주 짧은 회사생활을 하면서부터인데 이미 내 몸과 마음은 양복을 입고 상사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하기 싫은 일을 하기엔 너무나 달랐던 다른 세계를 보고 말았다는 것이다, 당시 한참 잘 나가는 회사였지만 왠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의 발전은 ..

중매로 아르헨티나로 갔고 북한 사람들을 보았다

브라질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이 나라 화폐들은 각각 미국 달러에 대한 환율이 달라서 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화폐를 달러로 계산해서 다시 그 나라 파라과이(과라니) 돈으로 환산해서 바꿔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당시 남미의 모든 국가는 인플레이션이 많이 높았기에 돈이 들어오는 순간 바로 달러로 바꾸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의 가치가 하루가 멀다 떨어지기에 재빠르지 않으면 손해를 입기가 쉽다, 어느 식당을 가도 파라과이의 과라니 돈을 받기도 하지만 달라, 브라질 돈 아르헨티나 돈도 역시 사용이 자연스럽게 되는 나라였다,, 처음엔 좀 이상했지만 그런 곳이 파라과이었기에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브라질을 다녀온 후 얼마 안 되어 아르헨티나의 어느 누구한테 중매가 들어왔다, 아직 중매를 보고 결혼을 할..

두발의 총격과 자동차 경주,,그리고 사고

파라과이의 교민들도 한인 사회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다들 한집 건너면 다 같이 알 수 있는 그런 친근감 넘치는 한인 사회였다. 어떤 면에선 너무 자세히 알아가는 이웃의 동포들이 부담이 갈때도 있엇지만 쓸데없이 이유도 증거도 없는 소문도 많이 나는 곳이엇다, ​ 친구 박ㅇㅇ 그를 알게 된 지는 파라과이 들어가서 약 2년 정도? 된 후였다 우연히 이들과 친구가 되고부터 이민 생활이 많이 달라 진 것은 사실이다, 같이 여러군데를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가졌다,추억도 많이 있지만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다, 아마도 파라과이에선 진짜로 내가 친구가 필요했었던 거 같았다, 당시엔 너무나 누군가가 나에겐 절실했던거 같다, 지금 와서 보면 내가 누구와 친해지면 친해진 자들과 더 있고 싶어 하는 나만의 천성이 있어서 그랬나..

돈 버는 재미와 친구들과 조용한 규칙

파라과이에서 2년이 넘은 후 드디어 해보고 싶은 새로운 일을 찾았는데 그 일은 파라과이라면 한번쯤 생각 해 볼 일이었다, 파라과이는 세금이 없이 모든 물건을 들여와 팔 수 있는 이상한 나라였는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흔치 않은 물건을 한국에서 가져와 팔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이 넘게 생각해서 찾았던 나의 첫 번째 아이템이 바로 전기 태스트기였다, 지금까지 그 이름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태스터기 회사의 정확한 이름은 새한 태스터기였다, 전기 코드에 전기가 흐르는지를 알수 있게 작동하는 이 기계는 사각형 모양의 노란색 바탕의 기계였는데 빨간색과 검은색 전기줄로 전기의 흐름을 책업하는 작은 기계였다, 그러나 전기를 취급하는 모든 사람에겐 꼭 필요할수 있는 거였다, 우연히 ..

브라질에서 만난 구세주들

드디어 브라질에 왔다, 그러나 어디를 어떡해 가야 하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당시엔 인터넷이 없었던 1986년도였다, "어디를 가야 하는가"??,, ​ 터미널에서 밖으로 나오면 조그만 길거리 커피를 파는 곳이 즐비하게 있었는데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낯익은 말소리가 들리다 한국 말이었다,, 나는 눈치고 머고 마시던 커피를 던져 버리고 그들에게 달려갔다,, "죄송합니다 부탁 좀 드립니다",, "한국 사람들이 있는 한인 타운을 가야 하는 데 도움을 주십시요",,!!! 구세주였다,, 브라질 밀입국 여행 중에 몇 사람의 구세주를 만났는데 이들이 그 첫째 구세주였다,, 그들이 나를 한인들이 주로 있는 봉헤치로 라는 거리의 어느 곳에 내려 줬고 그 근처에 중국인들이 하는 모텔을 잡고 하루를 보낼 수..

브라질 로 밀입국을 하다

파라과이는 매우 더운 나라다, 그리고 가난한 나라이다 길거리를 5분만 걷다가 보면 이 나라 도로가 콘크리트 거리가 아니고 많은 돌을 땅속에다 박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 살다 처음 이나라에 도착한 후 가장 이상하게 생각되엇던 부분이기도 했다, 처음엔 돈이 많이 드는 콘크리트보다 이렇게 돌들을 땅에 박아 놓으면 더 경제적일 수 있어서 그랬나??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시멘트 대신 돌을 이리 땅에 박아 놓은 것이군,, 생각했었다 시간이 가다 보면 돈이 없어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 더운 곳이기에 이렇게 돌을 땅에다 박아 놓은 것이 도로가 망가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콘크리트도로 깔다 보면 빨리 마르지 않았고 그런 상태에서 그 곳을 걷다 보면 푹푹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그때 그 당시는 그..

1군단 사령관의 쿠테타

파라과이에서 가장 끔찍했던 경험중 특별하게 일반 사람들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게 있는데 바로 혁명을 위한 전쟁을 구경했다는 것이다, ​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6시의 아순시온 파라과이 그 시간부터 집 부근의 주민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2층의 집에 살고 있었고 그 집에서 3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대통령 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집 모퉁이에는 그 대통령 궁을 지키는 경찰들의 숙소가 여기저기 있었고 그곳의 군인 신참들은 경계를 서면서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집도 지켜주고 있었다, 그래서 그 근처엔 도둑이 없었고 아주 안전 했던 집이었다, ​ 소문은 어디선가부터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파라과이도 혁명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혁명이 파라과이에서 일어난다,? 한번 해볼만한 사건일..

아침은 파라과이 점심은 브라질 저녁은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는 당시 성냥 하나 만들어 내지 못한 나라였다, 생필품 거의 전부를 이웃 나라에서 아니면 다른 이민자들에 의해 밀수로 들여오곤 했는데 그것이 당시 파라과이의 시장경제였다, 그래서 그런지 당연했던 것은 이런 가난한 나라에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자동차는 거의 다 있었다,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넘어온 유명 자동차가 자갈로 만들어진 이 거리를 달리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낄 정도로 발란스가 안 맞는다고 생각을 하곤 했다,, 나중에 안 것은 수많은 자동차를 훔쳐서 이 나라에 갖고만 들어오면 번호판이 너무 싶게 나온다고 한다, ​ 아마도 세금을 내고 장사를 하라 했으면 파라과이에 있을 사람은 거의 없었을 거다, 내 나이 22살 땐 뭐 이런 나라가 있어,, 하는 푸념의 말들을 많이 했으나 시간이 흐르..

헤이 꼬레아! 라고 불리고 있었다,

파라과이가 그리 나쁜 것만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22살의 어린 청년의 눈으로 본 이곳의 아가씨들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란색 눈과 밤색의 눈이 많았고 피부는 백인형의 얼굴에 검은 머릿결이었지만 한국에서 갓 와서 본 당시의 눈엔 정말 외국의 여인들을 보는 것이었다, 나중에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밀입국을 해 여행도 하면서 파라과이 여인들과 비교를 했지만 특히 파라과이 여인들은 이쁘고 순박함까지 있었다 이민 온 한국 사람들 중에는 만만치 않게 파라과이 여인들과 결혼을 해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만큼 파라과이 여인들은 순박했고 예뻤으며 부지런했다, ​ 동양사람,, 특히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그곳 파라과이에서 그곳 현지인들에게 눈에 띄고 있었는데 당시 1983년도의 파라과이는 엄청난 이민자들..

이민은 잔인하다는 거였다

파라과이 시대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시기는 친구 없이 외롭게 지내던 그 1년의 세월이었는데 그 1년이란 시간은 이민시기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것을 경험했는데 결론은 이민은 잔인하다는 거였다,, ​ 한국의 친구들에게서 거의 일주일에 한두 번씩 편지가 날아들어 왔는데 동네 친구들부터 성당의 친구들 그리고 이곳에 오기 바로 전까지 가장 많이 어울렸던 대학 때 친구들로 부터였다, 그러고 보니 여러 군데서 많은 친구가 나에게 있었다, 문제는 이들의 편지 내용이었는데 거의 전부가 군대 가기 전에 신나게 놀고 있다는 내용이었고 당시 내가 떠나오기 바로 전 같이 추억을 쌓아갔었고 그 추억의 후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것들은 23살의 신나게 놀아야 할 나의 기를 꺾는 내용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