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민 이야기

뭐? 자식들 때문에 이민을 와서 살아???

김 항덕 2020. 7. 29. 15:10

파라과이는 동화 같은 나라였다

그곳에 살면서 늘 생각은 객관적이었다,

이 나라를 평가하는 것을 즐겼는데 결론은 이건 나라도 아니라는 것으로 끝을 내곤 했고

 일기장에서도 수많은 글 중에 이런 나라가 있나??,, 하는 물음표의 연속이었다,

파라과이의 전체 인구는 당시에 3백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하며

 이웃에서 그리고 유럽이나 다른 나라에서 이민 와서 마구잡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백만 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언어는 스페인어이다,

약 100년 전에 이웃 나라 볼리비아하고 전쟁해서

 남자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모계 사회인 나라,

그래서 인구를 늘리는 정책을 폈는데

 이 나라에서는 강간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고 섹스에 거의 오픈이 되다 싶은 나라,

길거리에서는 창녀가 많이 있고

 어디에서건 마약을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

카지노가 많으며, 낮이건 밤이건 카지노에서는 항상 무서운 사건들이 생기는 나라

낮인데도 극장에서는 성인 포르노를 상영해서 

열심히 섹스를  권장 하는 나라,

주택가 한 복판 노천극장에서 12시 이후에 성인 포르노를 상영하는 나라,

사람을 죽이고도 돈으로 해결이 되는 나라,,

그런 나라가 내가 있었던 1983년도의 파라과이였다

그렇게 이민 생활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30년이 넘게 외국에서만 살고 있다,

3년이란 굳은 약속을 나 자신과 했지만 그게 30년을 넘어 아직도  한국을 가지 못하고 

이렇게 외국에서 살고 있는 있는데 이런 해외생활을  단 한 시간이라도 난 만족을 한 적이 없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나의 소원은 한국에서 사는 것이다,

 

23살의 청년은 파라과이에서 한 해가 가면 갈수록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나의 의견을 계속 무시해 버린 아버지의 힘에 난 늘 무기력 했고 

그럴수록 아버지가 너무나 미웠다,

일주일에 두 세 번 전화국에 가서 한국의 아버지에게 전화했는데 

그 내용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는 거였다,

비행기표를 보내 달라는 아주 간곡한 통화였는데 늘 허락을 받지 못했고 

어떨 때는 말 자체를 통째로 무시를 당했었다

아주 끈질기게 전화를 했지만

 결국 허락받지 못했고  전화를 하고 온 날은 너누나 우울했고 눈물로 하루를 그대로 보낸 적도 있다, 

그만큼 23살의 청년인 나는 파라과이가 싫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 한구석에선 무거운 분노가 조용히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아무튼 난 그렇게 하기 싫은 이민 생활을 시작한다,

 아무 일가친척도 없는 곳에 혼자 떨어져 생활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을 안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외 생활이 시작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민 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이 자주하던 말이 있다,,

,너무나 듣기 싫었는데,,

이렇게 자기네들이 이민 와서 살아가는 것은 결국엔 자식들 때문이지,, 하는 말이었다,,

뭐? 자식들 때문에 이민을 와서 살아???

파라과이로??

당신들이 무능력해서 이곳에 온게 아니고??

웃기는 말들이다,

자식을 위해 파라과이로 왔다고,,???

우리 아버지도 그랬을까?? 아마도 같은 생각을 했을거다,,

당시 아버지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어렸던 때였다,

지금도 난,, 그의 결정에 커다란 실수를 했다고 보고 있다,

...........

 

 나중 예기지만

시간이 흘러 결국 내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는 순간

난 이 작은 동화 같은 나라를 빨리 떠나서 좀 더 큰 곳으로 가고 싶어 했는데

그곳이 미국이었다,,

그렇지만 파라과이에서의 20대는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사건들이 있었던 시기였다,

이 창에서 그 당시의 이야기를 계속 펼쳐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