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여행 이야기/운대산

중국여행 송나라 거리 모형도

김 항덕 2020. 7. 3. 03:31

상하이 엑스포 때인 2010년도에 가장 인기가 있었다는 

송나라때의 거리 모습이라 한다,
상하이 엑스포 때는 이것의 10배 크기로 진열을 해 놨었는데

 이곳 박물관엔 축소해서 진열을 해놨다,
많은 사람의 눈이 이곳을 머물고 있었고 

나 역시도 이곳에 많은 시간을 두고 감상을 했다,
부러운 역사와 그것을 다듬고 보전하며 후세에 물려주려고 하는 

이들 중국인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송(宋, 960년~1279년)은 중국의 옛 왕조이다.

960년 조광윤이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개봉(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는 송(宋)이었으나, 춘추시대의 송, 남북조 시대의 송 등과 구별하기 위해

황실의성씨를 따라 조송(趙宋)이라고도 부른다.

통상 1127년 금나라의확장에 밀려 장강 이남으로 옮기기 전을

북송, 이후 임안(지금의 항저우)에도읍을 옮긴 것을 남송이라고 불러 구분하였다.

 

북송·남송 모두 합쳐 송, 송 왕조라고도 한다.

수도는 개봉(開封, 또는 변경),남쪽으로 옮긴 후 실질적인 수도는

임안(臨安)이다. 훗날 원나라에게 멸망당한다.

세계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정권이며, 상비 해군을 설치한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문치주의 국가로사대부 사명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전의 왕조들과는 달리

철권폭정을하지 않고 문화 정치를 폈다.

시대적으로 북송과 남송으로 나뉜다.

이 시기 당나라 시대부터 크게 발전된 괭이 등의 농기구를

배경으로 점성도(占城稻)라는 안정성이 있는

조도(早稻)가도입되어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새로운농업으로 인해 북송시대의 인구는

약 1억 명에 달했을 것이라 추정되었다.

송나라는 예술, 사상 및 각종 실용기술의 발달이 두드러져,문화적으로 풍요롭던 시기였다.

제지, 인쇄기술의 향상과 시민경제의 발흥으로 인해

이때까지 일부 관료, 귀족에게 독점되던 문학, 사상 등이 시민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중국의 여행 중에 만난 가이드는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자기 고집이 많고

 아직 가이드로서 많은 경험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우릴 대하는 태도가 불성실했다,
나랑 같이 간 사람들은 70대를 넘어 80대 노인분들도 있고,
나이는 내가 어린 편이라 함부로 나설 자리도 아닌듯했다,
하지만 이 어린 가이드는 다음날에도 점점 우리 일행을 무시하는 듯,
일정에 있었던 몃몃 곳을 그냥 넘어가려 했다,

나도 여행을 많이 해봤고 미국을 포함해 유럽 남미 등 안 가본 곳이 없으며

많은 가이드를 경험해 봤는데.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내가 그에게 물어보고 타일러 본다
조선족이었던 그는 한국 사람들에게 많은 불신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는 한국 사람을 자기와 같은

민족으로 보지를 않고 전부 돈으로 보인다는 표현을 썼다.,
아주 대놓고 말을 했다


나는 그에게 한국 사람 때문에 너는 일자리를 잃지 않고 

일을 하고 있는데 고마워하지를 않다니?
먹고 살게 해주는 게 한국 사람 아니냐!! 

내가 그에게 타이르듯 말을 했지만….
그는 한국에서 자기가 겪었던 조선족에 대한 차별을 예기해줬다,
그러면서 강조 했던 것은 자기는 중국 사람이다,

 라는 말을 자주 했고 우리와 같은 말을 하지만 완전 국적과
환경이 틀리니 자기가 이러는것을  이해 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8명의 작은 인원을 대리고 힘들게 여행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난 이해를 못한다고 했다,,돈을 내고 여행을 하는것인데 돈을 낸만큼은 대우를 받고 싶었다,
두 번째 날은 호텔서 일찍이 나와 운대산을 갔었다


웅장한 운대산을 구경하면서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가이드 때문이었는데 이런 나의 마음을 나이 드신 일행분들에게 일단 말을 했다,
가이드의 태도와 일정에 있던 몃몃 군데를 구경 못하고

 마음대로 일정은 바꿔버린 가이드의 태도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이리 적은 일행들을 데리고 힘들게  가이드 하는 것이

 돈도 안데서 싫다고 한 그 안내자의 뻔뻔함에,나를 포함한 모든 일행의 맘 속에멍을 만들고 있는

그 어린 가이드의 표현력이었다, 
요즘은 좋은 세상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전화기가

중국의 험난한 운대산 계곡에서도 한국과 연결이 되니 말이다,
같이 간 아버지는 그냥 참자고 했고 다른 분은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 한다,
나도 그냥 넘어 갈 수가 없었다, 
한국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 운대산으로 빨리 경험 많은

다른 가이드로 바꿔 달라고 했다 
한국 여행사도 눈치를 챈 거 같았다, 


내가 나이 어린 안내자를 교체하기 위해 집요하게 

한국 여행사에 전화를 하는 동안 그 안내자는 한마디 했다

 다른 사람이 와도 이리 적은 인원은 잘 안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올 사람도 없어요, 라고, 나는 정말 그럴까? 

아주 사력을 다해 한국 여행사에 전화를 했다. 

안내자의 교체가 과연 이루어 질 수 있을까? 나도 궁금했다, 
사실 나는 여행 중의 그 어떤 상황도 침착하며 즐기는 편이다, 

아마도 이 상황도 과연 내가 해 낼 수 있을까….
 한번 해보는 거야, 안되면 안 되는 거고, 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시작했지만

 전화를 거는 도중에 나의 승부욕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과를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다, 될 수도 있지만

완될수도 있다는 식의 어정쩡한 결론이 싫다, 안되면 확실히

안 되는 거고 될 수 있다면 빨리 늦추지 말고 해 달라는 것이다, 
전화를 1시간 안에 5번 정도를 한 것 같다, 
결국 결론이 났는데 안내자 교체,,, 근처에 있는 안내자를 섭의 하여 2시간 안에 보내 준다는 것이다, 

 

약 3시간에 걸쳐 운대산을 구경했다
 새로운 가이드가 교체가 되었다,
새로운 가이드 역시 조선족이었지만 전의 

그 어린 가이드와 많이 달랐다 우리 맘에 쏙 드는 가이드가 왔다 
무엇보다 어른을 공경할줄 아는

예의바른 가이드였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
우리의 여행은 시간을 쪼개어,, 보지 못한 것부터 봤으며

  다시 시작하는  새 기분으로 여행했다,
 나와 한국부터 출발한 37살 먹은 사람,그리고 새로은 가이드,,

3명은 내 방에 모여 매일밤 술을 마셨다,근처 교포가 하는 노래방에도  가서  노래도 불렀고 밖에 나가 양꼬치도 먹으면서 낮에는 관광, 밤에는 여흥을 즐기면서

내 식으로 여행을 시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