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이야기/라오스

라오스 불쌍한 몽족의 아이들

김 항덕 2020. 7. 7. 04:15

몽족을 처음 만난 것은 1992년도 프레즈노에 와서였다, 

이곳 프레즈노엔 중국인도 필리핀인도 베트남인도

 라오스인도 아닌 몽족(Hmong people)이 있었다, 

 

이들이 인구의 숫자도 

5만여 명이 있다고 했다, 

적은 숫자가 아니다

 

내가 한국 사람이지만 동양인이라

 프레즈노 백인들에게 

나 역시도 몽족으로 대접을 받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프레즈노의 동양인은 몽족이라는

 당시엔 들어보지도 못한 민족이 와서 살고 있었다 

 

점점 이들 몽족에 관심이 생겼고

 이들에 대해 많이 물어 보며 자연스레 몽족인 친구도 생겼으며,

  몇 명은 직원으로 같이 일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몽족은 프레즈노에도 많이 있지만,

 미국의 동부 필라델피아에도  수만 명의

 몽족이 살고 있다고 한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도 많은 수의 몽족이 있다,

 

내가 이곳 라오스에서 가장 관심을 두고

 가보고 싶었던 곳이 마로 이곳

 몽족 마을이었다

 

이들의 성을 살펴보면 이씨, 최씨, 성을

 가진 이들이 상당히 많다.

 

내가 한국의 성도 이, 최가 있다고 하면

 그들도 깜짝 놀란다, 

어쩜 우리의 먼 조상이 같을 수도 있다,

 

 된장의 음식을 먹는 것도 비슷하며

 생김새도 아주 비슷하다, 

엉덩이엔 몽고반점도 있다고 한다, 

이들 몽 족이 이곳 라오스에 

살고 있다한다 

 

많은 호기심과 친근감을 갖고 이들 마을을 방문했다,

 

이들의 고향은 이곳 라오스가 아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지도를 보면 

베트남과 라오스 태국의 국경이 

붙어 있는 것을 본다, 

이들이 원래 살아왔던 고향은 

베트남과 라오스 국경의 산 꼭대기 산맥 근처였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국은 이들의 독립을 전제로

 미국을 도와줄 것을 강요했고 

몽족은 실제로 미국을 도와 

라오스를 통해 들어오는 베트남의 보급로를 방해 공격했으며

 상당히 많은 타격을 입혔다고 한다, 

 

배트남전쟁때 어린아이 포함해 남자의 상당수가 죽었다

그 숫자는 공식적으로 5만명에 이른다,

 

전쟁에서 패한 미국은 이들 몽족이 베트남으로부터

 보복 탄압을 받는 것에 대한 비난을 막기 위해 

정치적 망명을 허가해 주었고 그 상당한 숫자가

프레즈노와 필라델피아로 이주했다

 

아직도 이들 몽족은 독립을 원하고 있고

이들의 임시정부는 미국에 있으며

현제 미국에 살고 있는 몽족의 수는 26만명에 이른다

 

 

나라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이들 몽족은

 가난한 나라 라오스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 

 

우리 일행은 이들에게 필요할 것 같은 옷과 먹을 것과

 과자와 장난감 등을 잔뜩 사서

 이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이들 몽족 마을은 방비엥에서도

 한참 떨어진 개울이 흐르는

 어느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당 50불, 어떤이는 100불,,, 등을 걷었다, 

방비에서 좀 큰듯한 가게에 들러 장난감 

옷가지 등을 사간 우리 일행은 

몽족을 방문해서 가지고 간 선물을 나눠줬다, 

 

 

몽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묘(苗)족 혈통으로

 베트남,라오스,태국등에 
흩어져 살고있는 소수민족이다.

 

1960년도 베트남전쟁때

CIA는 라오스 공산반군인 파테트 라오군에 맞설 

집단으로 몽족을 지목하고 적극 지원했다.

라오스의 몽족은  라오스 중부와 북부 산악 지역에 

살고 있었는데 심폐기능이 발달하고 지구력이

좋아 산악작전에 유리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라오스 정규군도 존재했지만

 장비나 훈련이 열악했고 특히

 정신무장이 안된 나약한 군대였기

때문에 밑빠진 독에 물 붙는것보다는 

몽족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훈련시켜 

정예부대를 육성하는것을

선택한 것이다.

 

 

1962년 CIA는 라오스 북부 롱청(Long Cheng)에 

처음 기지를 세우고 몽족을 지원했는데

몽족의 지도자 방 파오 장군(General Vang Pao)이 

조직한 게릴라 부대는 롱청을 근거로

활동하며 북베트남 정규군과 파테트 라오군에

 맞서 큰 활약을 하게된다.

 

 

몽족용병들은 북베트남 후방지역의 

교란과 베트콩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군포로를 구출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 하였다.

작은 키에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매우 용맹한 전사들 이었다고 한다.

 

 

몽족군이 주둔했던 롱청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라고 할 만큼 오지였다.

 

해발 약940미터 계곡에 위치했는데

 밤에는 기온이 떨어지면서 안개에 가려졌다.

1962년 당시만 해도 주민이 거의없는

 황량한 곳 이었으나

CIA의 지원으로 1964년 1260미터 길이의 활주로가 완성되고

1966년 세계에서 가장바쁜 공항중

하나가 되었는데

 이것은 미국이 당시 해외에 건설한 

최대규모의 시설중에 하나였다.

 

공항과 학교,은행등 사회기반 시설이 건설되고

 약4만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몽족 최대의 도시로 번성하였다.

당시 몽족들은 미국인 조종사들과 구호요원들을 

위한 부대시설 운영이나 라디오 수리,옷수선,구두수리등을

하면서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1973년 미군이 철수하자

 상황은 악몽으로 바뀌었다.

 

1975년 몽족은 라오스에 들어선 공산정권에 표적이 되어 

수천명이 보복살해되거나

 재교육 수용소에서

사망하고, 4만4천여명이 고향을 떠나 태국으로 탈출했다.

 

방 파오 장군을 비롯한 일부 몽족들은 미국,호주,프랑스로

 정치적 망명을 할 수 있었지만

5천여명의 몽족은 라오스에 남았다.

 

현재 라오스 밀림지대에는 몽족용병들과 

자손들이이 숨어 살고있다고 한다

 





 

이곳 프레즈노에 사는 

몽족의 국적도 다양하다, 

국적이 어디냐 물어보면 라오몽 어떤 이는 베트남몽 

어떤 이는 타이몽이라고 소개한다, 

각각 떠돌다 정착한 나라의 이름이며 

그 나라도 다양하다, 

 

지금도 몽족은 많은 수가 미국으로 이주하고 있다, 

미국은 이들의 정치적 망명과

 가족 초청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그 수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우리 일행이 자동차에 이들에게 나눠줄 물건을

 잔뜩 싣고 이들 마을에 다가갈 때, 

우리의 차는 흙먼지를 흩날리며 

이들이 사는 마을 중앙 제법 큰 마당에 이르렀다, 

마을을 향할 때 흙먼지 때문에 천천히 운전했는데

 몇몇 아이들은 우리의 흙먼지 뒤를 따라왔다, 

 

달려오고 있는 아이들은 이해하지만 흙먼지를 

뿌리고 달려가는 우리의 자동차가 미웠다,

 

먼지를 뒤집어 쓰고 달려오는 이 아이들의

 눈망울엔 그저 즐거운 모습만이 보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이부터 울고 있는 아이,

 뭔가를 잔뜩 집어물고 있는 아이…. 

애들은 단정치 않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왠지 이 애들은 앞으로 살아갈 때 굳건히 용감히 건강하게 살아갈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애들 중엔 꼭 틀림없이 훌륭한 장군감이 나올 것 같은 희망도 보였다, 

전부 건강하게 보였다,

 



 

같이 여행을 하게 된 일행분이 몽족 아이들에게 가지고 간 선물을 나눠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