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 이야기/캄보디아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잔악성을 알리는 센터를 가다

김 항덕 2020. 7. 7. 04:28

수도 프놈펜에서

 톡톡히 차로 약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킬링필드의 잔악성을 알리는 센터가 있다

 

캄보디아 전국에 약 800여 개가 있지만, 

이곳이 그중 가장 크며 지금도

 그 잔해가 나오는 곳이다,

 

70년대 대량학살로 약 3백만 명이나 희생되었는데 

그 잔악성을  세상에 알리며

 당시에 희생 된 사람들을 위로하는 취지에

 이곳 센터가 건립되었다,

 

 이곳은 당시 킬링필드가 행해졌던 바로 그 장소에 세워졌다

 

이곳으로 가기 전

이곳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갔는데

톡톡거리며 힘없이 달리고 있는 톡톡이 차 때문인지

이곳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더욱더 생각나게 했다

마음이 아주 무겁고 답답함을 느꼈다,

 

이곳의 정식 이름은  청아익 대량 학살센터

 

입장표를 받고 입구에 들어가면

 방문객들에게 한국말로도 알아들을 수 있는 

작은 이어폰과 전화기 크기만한

 가이드 폰을 나누어준다,

이어폰을 끼고 채널을 맞추면 위치마다

 한국말로 들을 수 있는 설명이 나온다,

 

앞 멀리서 보이는 저 탑이 위령탑이다.

 

왠지 이곳을 방문했지만 

이것을 구경해도 될까 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끔찍한 곳을 방문하고 나니

 몸이 저 앞으로 가지질 않았다,

 

저곳을 가면 끔찍한 유골들이 보일 텐데

 과연 저곳을 구경 해야 할까,,

그냥 이곳을 나가버릴까,,, 

이런 곳을 왜 왔을까,, 등등 수도 없이 갈등이 있었다,

 

 

학살의 시작은 평범한 생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70년도 초 미군의 폭격과 베트남 군인들이

 캄보디아 동쪽으로 들어오고부터 원인이 시작되었다,

 

캄보디아 프롬펜으로 피신을 하게 된 

피난민들의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고

 반대로 농촌 지역 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후 농업 생산이 격감했다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 시는 난민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으며

점점 고민을  할 수 바께 없었다

 

 수도 프놈펜은 점점 각 농촌에서 온 피난민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을 파고든 것이 크메르 루주였다. 

크메르 루주는 1960년에 설립되었으나,

 1975년 4월 17일 세력이 약해진 

전 정권의 론 놀 정권을 하와이로 망명을 보내버리고

크메르 루주는 수도 프놈펜에 입성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황폐해진 농업 조건에서

 프놈펜에 몰려든 난민들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고, 

더 이상 미국의 식량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프놈펜의 난민들을 농촌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여기에 사상적 측면이 더해졌다.

 

 캄보디아 공산당(크메르 루주)은 창건 당시에는

 사회주의 이념을 고수했지만 

1960년대 중반부터 마오이즘을 추종하고 있었고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문화대혁명 식으로 몽땅 농촌으로

 쫓아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중심엔 폴토라는 주범이 있었다

 

이렇게 도시의 사람들을

 지방의 농촌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운동으로 시작 된 것이 킬링필드다

각 지역에 집단 농장을 설치하고 

사회주의식 새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도시 주민들을 모조리 

농촌지역으로 내몰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했다,

 

 

 

 

17층 높이의 위령탑 안 모습이다,

무자비하게 학살된 수많은 유골이 전시되어 있다,

불교국가 캄보디아에서는 유골이 소각되지 않으면

  영혼이 자유롭지 못한다고 전해 내려온다,

이곳의 유골도 전부 소각되기를 바라는

 불심들의 청원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웬일인지 나도

언젠가는 이곳의 유골도 전부 태워져 편한 곳에서

 편하게 쉬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게 들어왔다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킬링필드는 끝이 난다,

학살의 명령을 내린 주모자 폴포트는 

태국으로 도망하여 3번의 결혼까지 하면서 호화롭게 살다가 

 1998년 4월 15일 사망한다,

 

아무런 죄 값도 받지 않고 명대로 편하게 살다 갔기 때문일까,, 

캄보디아가 더욱더 가엾고 불쌍하게 느껴진다,

 

1928년생이었던 폴포트는 프랑스까지 가서 

유학을 할 정도로 지식인이었다,.

유학 시절 공산주의를 접하면서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었다,

캄보디아로 귀국 후 

친미정권이었던 론놀을 몰아내고 공산혁명을 시작한다,

이후 20세기 최고의 학살이 시작 되었다,

 

이곳엔 곳곳에서 쉬면서 오디를 들을 수 있는

 휴식 공간이 많이 만들어져 있었다,

 

입구에서 나눠준 오디오 가이드를 차면

 17번까지 순서대로 이끌어 준다,

 

오디오에서 나오는 가이드의 설명도 왠지 모르게

 차분하게 들리는데 아마도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그 누구도 웃음이 보이지 않는다,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걷는 사람만 보인다, 

간혹 눈물을 흘리며 오디오 가이드를 듣는 사람도 보였다,

사진은 10번을 가르킨다

 

수많은 애도의 팔지가 있는 곳이다,

 

위령탑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을 구경하는데도

 왠지 분위기는 무거웠다,

왠지 혼령들과 같이하는 느낌도 있는 곳이다,

공기도 차갑고 사람들의 몸짓도 무거워 보인다, 

수많은 나무도 왠지 기분이 좋지앟게 보인다

 

톡톡이를 타고 위령탑까지 

가는 도중에 바람도 불고 비도 내렸다,

 

동남아에서의 비는 갑자기 내리다가 한순간 

끊어져 버리기가 일수였기에

 비바람을 맞고 가는 길을 계속 갔다.

이럴 줄 알고 난 비옷을 늘 갖고 다닌 것이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나 때문에 운전사는

 온몸이 다 젖는 것을 봐야 했는데 조금 미안했다,

나중에 팁이라도 두둑이 줘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나게 했다,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톡톡이를 타고

 비바람을 맞으면서도  길거리 풍경을 놓치기 싫었지만, 

사진까지 찍을만한 풍경은 나오지 않았다,

거의 벌판을 달리고 있었고

 한참 후 멀리서 보이는 목적지가 보였는데 

그곳만 뭔지 모르게 숲과 약간의 건물이 멀리서 보였다,

 

어느덧 프놈펜 시내를 벗어났다

프놈펜이 그리 큰 도시는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이 길을 혼자 가더라도 

이곳을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만큼

 오른쪽 한쪽에 수많은 차와 

건물과 숲이 우거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막상 도착을 하고 보니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데 

 위령탑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엔

 수많은 톡톡이들이 손님을 기다리며 대기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고

 길가엔 질서 없이

 마구잡이로 늘어진 크고 작은 포장친 가게들이 즐비하게 있었지만,

 표를 파는 입구 쪽엔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 위령탑을 구경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서양인들 10여 명이 내 앞에서 

표를 사고 있었는데 안에 들어가 보니 그 숫자가 전부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더 썰렁했고 

무거운 느낌이 들었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