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민 이야기

돈 버는 재미와 친구들과 조용한 규칙

김 항덕 2020. 9. 2. 10:50

파라과이에서 2년이 넘은 후 드디어 해보고 싶은 새로운 일을 찾았는데

그 일은 파라과이라면 한번쯤 생각 해 볼 일이었다,

파라과이는 세금이 없이 모든 물건을 들여와 팔 수 있는 이상한 나라였는데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흔치 않은 물건을 한국에서 가져와 팔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이 넘게 생각해서 찾았던 나의 첫 번째 아이템이 바로 전기 태스트기였다,

지금까지 그 이름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태스터기 회사의 정확한 이름은 새한 태스터기였다,

전기 코드에 전기가 흐르는지를 알수 있게 작동하는 이 기계는

사각형 모양의 노란색 바탕의 기계였는데

빨간색과 검은색 전기줄로 전기의 흐름을 책업하는 작은 기계였다,

그러나 전기를 취급하는 모든 사람에겐 꼭 필요할수 있는 거였다,

우연히 브라질 사람에게 오더를 받아 한국의 청계천 쪽 작은 가게에서 10개를 한국의 아버지께 부탁했더니

인편을 통해 들어왔다,

브라질 사람에게 그걸 보여줬더니 100개를 더 오더 했는데,,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청계천의 작은 가게와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의 무역이 성사되기 시작했다,

말이 좋아 무역이지만 사실 세금 없이 밀수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밀수라고 표현하기도 좀 이상했는데

공항에서 들어온 물건은 정식으로 부로커를 통해 통관이 되는 거였다,

다만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건 상관없이 가방 하나에 70불을 주고 찾았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서류가 있었다,,

나중엔 가방 하나에 100불까지 올랐다,

청계천에서 태스트 기계를 한국 돈 2천600원을 주고 샀다, 당시 달러가 650원 정도 했으니 달러로 계산하면 4불이었다,

도매가격이 왜 그리 저렴했는지 모르겠다,,

그 후 파라과이에서 도매로 21불에 판매를 했다,

나주엔 26불까지 올렸다..

마진의 차익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 돈을 모아 아버지는 여동생 시집을 보냈고 한국에서 땅과 건물을 사기도 했다,

어느덧 파라과이에서 돈을 버는 재미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방이 매주 한번 올 때마다 40개 정도가 왔는데

문제는 누군가에 의해 그 짐 가방을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파라과이 공항에 마중나가 짐 표를 받아야 했던것이 한국에서 짐가방을 붙이는 사람이나

짐표를 가져오는 사람이나 너무 번거로웠다,

주로 여행사를 통해 파라과이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그 짐표를 받아야 했기에 어떨때는 짐표를 갖고 오는 사람에게 수수료도 줘야 할때가 있었다,

그리고 짐표를 가져올 사람이 없을 경우엔 한국의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들도 그 짐표를 갖고 와야 했는데 그렇게,,

동생들도 그 짐표를 갖고 오면서 자연스레 남미 파라과이를 왕래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 5명은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우연히 모여지기도 했엇다,

나중엔 배로 실어 날랐고 국경의 도시에선 우리의 물건을 사기위해 돈을 미리주는 현상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였다,결론은 같은 한국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

엄청나게 한꺼번에 배로 들여와 덤핑을 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나 큰 재미를 본 후였기에 미련은 없었다.,

그럴때쯤 우연히 지금까지 카톡으로 연결되고 있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차ㅇㅇ을 제일 처음에 만났는데 그가 사귀고 있었던 친구들 사이로 들어가 한꺼번에 여러 명을 알게 되었다,

차ㅇㅇ인 덩치가 좀 큰 편이었다,

국내와 국제 정치 그리고 경제쪽으로 탁월한 나름의 판단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금가지 변하지 않았다,

타고난 기질인거 같다,

그는 자기의 생각이 바르다고 생각한 이론에 대해선 끈질기게 설득하는 편이었다 술도 잘 마셨지만 늘 자제해야 한다는 자제력도 갖추고 있었다,

장남으로 두 동생과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며 현제 뉴욕에 거주한다,

박ㅇㅇ는 늘 안경 낀 너머로 고민을 안고 살고 있어 보였다,

당시에 그의 아버지는 돌아가신 상태였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으며 그의 형은 한국에서 공부 중이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가장으로서 생긴 고민이 그의 얼굴에 배여 있는 거 같았다,

체구는 작았지만 영특하며 말하는데 조력이 있었다

늘 그의 주변엔 사람이 모인 거 같은데 그의 친화력에서 나온 거 같았다,

지금 브라질에서 살고 있다,

배ㅇㅇ인 이마에 굵은 주름이 굵직하게 그어져 있었는데,, 최근에 본 모습하고(2019년 엘에이에서 봤다,)

많이 달라 놀라웠다,,

입술도 굵고 약간 푸른색을 띠고 있으며 골격이 타고날때부터 커 보였고 건강한 체질이었다,

그는 늘 비즈니스를 생각하는 비지니스맨이었고 그 이미지는 최근에 만났을 때도 변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봤을때인 20대 초반때도 늘 비지니스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지금도 그 걱정거린 변함이 없었다,

그도 현제 브라질에 거주한다,

백ㅇㅇ인 음악에 소질이 많았다,

가끔 그의 교회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음악회를 열리기도 했는데

친구들 중에 가장 키가 작았지만 눈망울이 크고 말이 많았으며 모임때는 늘 사회를 보는 친구엿다,

친구 중 가장 술을 많이 마시고 좋아했으며 여자들에게 최고의 인기였던거 같았다,

그의 집에 드럼셋트가 있었고 술을 마시러 그의 집에 가면

취한 상태에서 드럼을 치며 혼자 무드에 젖어 있던것이 생각이 난다,

현재 그는 파라과이에 살고 있다,

이렇게 여러 명의 친구들을 사귀기 시작했는데

한국의 친구들하고는 차이는 분명히 있었다,

당시 이민 생활을 오래 하고 있었던 이들은 한국의 친구들처럼 놀 거리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 늘 뭔가에 눌려 사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은 왠지 그들의 고민과 일에 대한 것을 친구들끼리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기에게 닥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대단했다,

한국의 친구들은 친구니까 고민과 어려움을 같이 알고 도와주고 같이 해결했던 거와 비교해

이들 파라과이 교포 친구들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느낄 수 있었다

나 또한 내가 일주일 동안 물건을 팔러 국경도시에 다녀왔다거나

얼마만큼의 물건을 건물 딪쪽에 쌓아놓고 팔고 있다는 것을 이들에게 예기하지 않았다,

나 역시 나의 문제는 내가 알아서 고민과 분노를 참아냈으며

묵묵히 문제점들을 누구의 도움없이 해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국의 친구들과는 조금은 달랐지만 나름 이민생활에서의 조용한 규칙이라 생각했다,,

초기엔 내가 너무 친구들에게 기대했던 잘못된 측면을 시간을 가지며 그 이민의 규칙을 알게 된 것이엇다,

중요한 건 이들 친구가 이곳에 있었기에 7년이란 세월을 견딜 수가 있었고

점점 이곳에 젖어 들어갔으며 나의 소중한 20대의 추억이 바로 이들 친구와 함께 했다는 것이 지금 되돌아볼 때 가장 중요한것이다,,

지금도 카톡으로 이들과 거의 매일 안부를 전하며 살고 있는데

다들 그때의 추억을 예기할 때면 카톡에서 활기가 넘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