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민 이야기

중매로 아르헨티나로 갔고 북한 사람들을 보았다

김 항덕 2020. 9. 2. 10:53

브라질과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이 나라 화폐들은 각각 미국 달러에 대한 환율이 달라서 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화폐를 달러로 계산해서 다시 그 나라 파라과이(과라니) 돈으로 환산해서 바꿔 써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당시 남미의 모든 국가는 인플레이션이 많이 높았기에 돈이 들어오는 순간 바로 달러로 바꾸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돈의 가치가 하루가 멀다 떨어지기에 재빠르지 않으면 손해를 입기가 쉽다,

어느 식당을 가도 파라과이의 과라니 돈을 받기도 하지만 달라, 브라질 돈 아르헨티나 돈도 역시 사용이 자연스럽게 되는 나라였다,,

처음엔 좀 이상했지만 그런 곳이 파라과이었기에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브라질을 다녀온 후 얼마 안 되어 아르헨티나의 어느 누구한테 중매가 들어왔다,

아직 중매를 보고 결혼을 할 나이가 아니란 것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이민 사회를 들여다보면 좀 일직 결혼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빠른 결혼이 이민생활에서 자리를 빨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것 같다,

한국 성당에서부터 알고 지낸 아버지 지인의 중매로 아르헨티나로 선을 보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오케이를 했다, 모처럼 흐뭇한 구경거리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그것도 아르헨티나로,,가야 한다니..이웃나라를 또 다시 구경해 볼수 있는 기회였다,

브라질 갈 때는 밀입국을 통해 들어갔지만, 이번엔 정식 비자를 신청해서 들어가기로 했다,

아르헨티나에 들어가기 의해 신체검사를 받았고 얼마간의 돈을 지불해서 비자를 받았다

파라과이의 바로 옆에 있는 나라,

아르헨티나와 파라과이 국경은 그리 멀지 않았다,

차로 2시간 정도 가면 아르헨티나의 검문소가 나온다,

아르헨티나 사시는 분은 비행기로 오라고 했지만 난 버스로 가겠다고 했다,

브라질과 다른 아르헨티나의 넓은 땅을 보고 싶고 왠지 이번엔 여행을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좀 길게,, 버스를 이용하고 싶었다,

국경은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일일이 검문을 했다 나 역시

그 앞에서 여권을 보여 주고 비자를 보여 줬다 아무 일도 없었다,,,

나는 괜찮았지만 그곳에서 잊지 못할 광경이 보았다,

나와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부터 같이 온 어느 부부가 이들에게 곤경을 겪게 된다

그들은 영국 사람인듯했다 스페인 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

그들도 나처럼 아르헨티나 비자를 가지고 있는 듯 했는데,

문제는 그때 그 당시에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틀랜드 라고 하는 섬을 두고 전쟁을 벌인 직후였다,

콧수염을 한 영국 남자와 그의 부인인듯한 여인은 결국 입국을 거절 당한 것 같았다,

어디론가 군인들과 같이 가는 것이 보였고 그 부부를 태우지 않고 버스는 출발했다,

얼마동안 이들의 안타까움이 지워지질 않앗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길은 역시나 길고 길었고 지루했다 하지만 비자가 있어서

브라질로의 입국보다는 맘은 편했다,

파라과이와 다는 느낌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한국에서 어릴 때 알고 지낸 아는 후배가 있었다

한국부터 알고 지내온 중매인의 아들이었는데 나이는 나보다 적었고

나를 형이라 불렀으나 겨우 1살 정도의 차이만 있었다

아무튼 처음 가본 나라에서 그런 지인이 있다는 것과 전혀 없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분이 다르다,,

많은 편안함이 있었다,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늦은 시간이었다

브에노스 아이레스에 도착했을때 비가 내리고 있엇고

사람들은 긴 우산과 비옷등을 입고 분주히 다니는것이 보엿다,

늦은 시간에 어딜 갈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동안 파라과이에서 배운 스페인어로 가까운 모텔에서 하루를 잤다,

다음날 소개해주는 여자와 선을 봤으나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곳 아르헨티나에 온 것만으로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후배와 함께 이제 아르헨티나에서 일주일 정도를 묶으면서 구경을 해야 한다,

아마도 남미에 온 후 가장 여유롭고 즐겁게 외국의 여행이라 생각했던 순간이기도 했다,

나에겐 가이드보다 더 편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후배가 있었고

그 후배역시 날 핑계로 맘 놓고 휴가를 보낼 참이었다

센트로 (Centro) 에 가면 온세(once) 라고 하는 길 이름이 있는데 이곳이 한국 사람들의 시장터였다,

전에는 유대인이 주로 상권을 잡고 있었지만 얼마 전부터 한국 사람들이 이곳 상권을 잡아

본격적으로 봉제업의 메카로 자리 잡은 곳, 온세(once)다

이곳에서 후배네도 자리 잡고 봉제업을 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로 부터 가게가 온세에 있다고 하면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듯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온 세란 지역은 이곳 시장의 중심지였다,

9 de Julio 라고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는 극장가가 늘어져 있었던 것이 흥미로웠다,

엄청난 극장가의 거리에서는 불 거리 영화도 있었지만, 길거리에 많은 장사치도 성황을 이루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수도 한가운데 갈고 뾰족한 승리의 탑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근처에 많은 연인이 사랑을 나누는 로맨틱한 분위기도 볼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고 길다는 리바다비아 길을 걸어 봤다. 길을 건널 때 중간에 쉬었다가 걷게 되는데

차선이 14차선 이였을 거라고 기억이 된다

파라과이의 모습과 아르헨티나의 모습과는 많은 대조를 이루는 모습이었다

브라질의 상파울루는 높은 디자인의 빌딩의 숲이었다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많이 보이는 고딕의 모습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나라가 망가지고 있었는데 여러 명의 대통령이 임기가 채워지기 전에 경제문제로 많은 사람이 갈려 나가고 있었다,

내가 도착 했을 때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알폰선 대통령이었는데

임기가 다 되어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하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막강한 후보는 멤엠 대통령이었다

온통 멤엠 대통령 후보의 얼굴이 아르헨티나 전역에 붙어 있었다.

다른 후보의 얼굴은 별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투표를 하나 마나 다음의 대통령은 멤엠 같아 보였다

나중에 멤엠이 대통령에 당선 되어 안정된 정치와 인플레이션을 잡았지만,

왠지 아르헨티나는 후에도 후유증은 계속되어갔다,

후배가 나를 경치 좋은 곳으로 저녁을 초대했다,

그곳은 수많은 카페와 술집들이 몰려있는 곳의 어느 식당이었는데 밖에서는 여기저기서

탱고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고 또 다른 곳에서는

마리아치들의 바이올린과 기타 소리가 마구 엉키면서 들리는 곳이었다,

우리는 탱고가 들리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탱고의 나라에서 탱고 춤과 음악을 들으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와 후배가 와인을 곁들인 우아한 식사를 막 하려는 순간,,

바로 뒤쪽에서 한국말이 들려 오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이 몰려 있었는데 그 억양이 좀 이상했다,

처음엔 중국 사람들인가,, 싶었지만 분명 한국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북한 사람들이었고 단채로 회식을 하는 자리였듯 했다,

10여명이 모여 있엇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만 해도 북한 사람들 하면 공산국가 사람이란 것을 떠나 우리의 바로 가장 큰 적국이었다,

나 역시 대학까지 다니다 온 상태였고 어릴 때부터 반공교육이 아주 철저히 받아온 상태였기에

왠지 모르게 몸이 경직되어 그들을 쳐다보기도 싫었다

그 순간 자리를 옮기고도 싶었지만, 후배가 그냥 앉아 있자고 했다

이곳은 우리 나라도 아니고 저들의 나라도 아닌 남미의 아르헨티나이었다,

나의 시대엔 공산국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놀랍고 호기심에 찬 사건이었다 그것도 북한 사람들을 만나다니...

그들도 우리의 자유스러운 행동에 약간 거슬린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 있다,

우리는 자유스러운 머리 스타일과 술과 담배를 품어댔다,

당연히 술과 음악이 있던 곳에 담배와 시끄럽게 떠들면서 먹어대는 음식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분명 내 또래 같은 그들 중 한 명에게 눈길이 갔었는데 그는 경직되어 있었다,

굳은 얼굴과 눈동자가 고정되어 그의 상관인듯한 누군가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고 제대로 술도 마시질 못하고 있었고 앞 사람의 예기만 귀 기우려 듣고만 있엇다,

그런데 바로 그들의 옆자리의 우리는 떠들고 웃고 마시고 담배를 피워대고,,,

너무나 대조적인 두 한반도에서 태어난 자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무리에서 어른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50대로 보였고 안경을 낀 학사 풍의 점잖은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에게 와인이 어떤 것이 좋으냐며 말을 걸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자기는 북한의 스페인과 학자라고 소개한 그로 인해. 우리는 스페인어와 아르헨티나, 등을 소제로 약간의 대화를 가졌고

급기야 남한 사람들의 이민 생활의 수준 같은 거로 자연히 대화가 넘어갔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엄청난 다른 이질감을 느끼고 대화도 많이 길어졌다,

우리에게 다가온 그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도 않았으며

많은 시간을 우리와 같이 탁자를 쳐 대면서.. 자기의 주장을 우리에게 전달하려 노력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나름대로 억압받는 북한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식의 위험한 말도 한 거 같았다,

그들은 아르헨티나, 칠래, 페루를 순방하며 자기들 나라로 돌아간다고 한다,

해외 공간에서 일한다고 했던 그들 증 한 명은 선원 이리고도 했으나 그 당시 왠지 그들의 모든 말들은 다 거짓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들의 소개도 믿지 않으려 한 경향이 나에게 있었다,,

그만큼 80년도의 북한은 해외에 나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역시 큰 적국이란 생각을 했었다,

이후 북한인 몇 명이 더 우리와 합세를 해서 더욱더 깊은 아르헨티나 밤을 보냈다,

계속 자기의 주장이 상대방 들에 넘어가길 노력했지만 결국 서로 얻은 것은 없었다,

밖에는 밤새도록 탱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람들도 지나가다 탱고 춤을 한바탕 추고 지나갔다,

카페 안에서는 후배와 나, 북한사람들, 이 카페가 문을 닫을 때까지 술을 마시고 대화를 했었던 잊을 수 없었던 탱고와 함께한 밤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백구 촌 이라는 한인 타운이 있었다

초창기 이민자들은 어느 아는 사람 없이 배를 타고 이 땅에 들어와 우두커니 부둣가에 짐을 내려놓고

한없이 걱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109번 버스를 타고 무작정 종점까지 갔었고…. 그들은 그 109번 버스 종점에 자리를 틀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이 한인들 사이에서 자리 잡은 최초의 동네가 되었는데 한인들 사이에서는 그곳을 백구 촌이라고 부른다,

호텔 식당 병원 등 한인 사회의 분위기가 만들어진 곳이다,,

이후 3일 정도 늘 백구 촌의 호텔에서 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