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민 이야기

대박난 샴푸 공장 그리고 결혼후 미국으로

김 항덕 2020. 11. 19. 05:31

파라과이에서 내가 살았던 시기는 83년도부터 91년도였지만

86년도와 88년도 두 번에 걸쳐 한국에서의 생활 약 2년 정도를 빼야 정확한 날짜가 나온다,

86년도 노태우의 6.29 선언 이후에 비로서 한국을 갈 수 있게 되었고 이후 88년도 2월에 한국을 가서 남은 학기를 마치고 졸업을 한다,

졸업 후 당시 대 기업이었던 모 회사에 입사해 약 3달 정도를 회사생활을 한 후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온다,

다시 파라과이로 돌아오는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3달 정도 다닌 아주 짧은 회사생활을 하면서부터인데

이미 내 몸과 마음은 양복을 입고 상사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하기 싫은 일을 하기엔 너무나 달랐던 다른 세계를 보고 말았다는 것이다,

당시 한참 잘 나가는 회사였지만 왠지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나의 발전은 없고 오로지 회사와 함께 운명을 맞아야 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

이 회사를 떠나고 한국을 떠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했다,

나의 운명은 내가 만들고 싶었다,

1년 반의 시간을 한국에서 가진 후 일단 다시 파라과이로 떠났다,

파라과이는 변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친구들이 없어졌다는 것은 큰 변화였다,

누군 뉴욕으로 떠났고 어떤 친구는 결혼해서 브라질로 사라져 버렸다,

한국 역시 올림픽이 끝나고 모든 게 변화를 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사회에 나갈 나이가 될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엔 누구든지 그랬겠지만 유독 미래에 대한 토론과 걱정을 많이 했던 거 같다,

한국에서는 군대를 다녀온 친구들이 점점 많아질 즈음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큰 고민을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고민의 과정을 거쳐 다시 파라과이로 갔는데

이 결정은 내가 했던 결정 중 가장 큰 결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게 친구들도 떠나 아무도 없던 그곳 파라과이로 돌아가 샴푸 공장을 하게 된다,

샴푸 공장은 한국에서 파라과이를 볼 때 무엇을 해 볼 수 있는 나라인가를 많이 생각했는데

대학 때 전공인 화공과에 대한 배움을 계속 시도할 수도 있었고

앞으로도 화학공학과 계속 인연을 갖고도 싶었다,

무엇보다 화학공업 쪽으로는 다른 것보다 이해가 빨리 왔기 때문에 해 볼 만하다고 생각을 했다,

한국에서 샴푸를 만들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가져와 실행에 옮겼다,

이후에 샴푸 공장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들어주었고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업 기질을 배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지금도 "샴푸 공장"이란 단어는 왠지 모르게 설레움과 젊었을 때의 패기에 넘쳤던 나의 그때가 생각나는 단어이다

샴푸 공장은 작은 양의 원액으로 실로 엄청남 수익을 올리는 사업이었다,,

샴푸는 만드는 원액이 있다,,

커다란 드럼통으로 당시 100불이었는데, 그것이 물과 다른 약품 등으로

섞여 나가면 8,000병의 작은 샴푸 병들이 만들어 나왔다,,

당시 난 원액까지는 만들 수는 없었지만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모양의 색깔이나 향기 등등 ,,

실로 많은 변화된 샴푸들을 만들어 낼 수는 있었다,

3달 동안 같은 샴푸를 생산하다 좀 싫증이 나면 색깔 모양을 하늘색에서

노란색으로 바꾸기만 하면 소비자는 새로운 샴푸가 나온 줄 안다,

같은 향기를 쓰다 약간 다른 향료를 섞어 내보내면 소비자는

또 다른 새로운 좋은 샴푸가 나온 줄 알고 산다,

무엇보다 일단 출고가 되면 크고 작은 그 어떤 마켓에라도 일단은 들여다 놔야 한다는 매력이 있다,

다른 마켓에 10박스를 들여놨는데

이 마켓은 몇 박스가 필요하냐고 물어보면 일단 무지건 들여놓고 보는 게 우선이었다,

샴푸는 두 가지로 상표로 나누어서 판매했는데

하나는 파라과이에서 만들었다는 선전을 했고 같은 샴푸를 병과 상표만 다른 것으로 바꿔서

스페인에서 만든 것이라 선전을 했다

두 가지 전부 잘도 먹혀들었다,

소비자는 같은 원료의 샴푸에 색깔, 향기. 병 모양, 등등 실로 많은 변화 같은 것에 현혹되어 써보고 좋다고 했다,,

100불의 원액에 약 8,000개의 병 속에 나오게 되는 샴푸는

한 개에 1불씩만 팔아도 진짜 엄청난 이득을 보게 된다,.

난 그 일을 나만의 독특한 병의 디자인을 주문해서 파라과이에 살던 최고의 날을 맞이하게 된다,

결국 샴푸는 물값 플러스 병값이 원가란 얘기다,

인건비도 엄청나게 싼 파라과이는

잠깐이나마 나에게 당시 가장 최고의 자동차 볼보를 몰게 했고 돈도 물 쓰듯 쓰게 만들었다,,

하루 수금해서 들어 오는 돈이 여행용 정도의 가방에 하나 가득했다,,

돈을 정리하기 위해 침대 위에 뿌려 놓은 그 돈을 밤새도록 정리했던 적도 있다,,,

당시 1989년도부터 시작한 샴푸 공장,

그때 즈음에 한국인 교포였던 s라고 불리는 한국 교포 아가씨를 사귀기 시작했다,

s는 나처럼 비슷한 시기에 파라과이를 오게 됐고 우리의 사랑도 익어가고 있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결혼을 할 거라는 믿음을 가진 만남을 시작하게 된다,..

2년 정도의 파라과이 샴푸 공장은 눈부실 정도로 빠르게 성장한다,

그럴 즈음,,

문제들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창고를 옮기고 기계를 설비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전문가들도 고용하고,,,,,

그럴 때에,,,,,

공장에서 처음부터 나를 도와준 직원을 해고해야 할 사건이 생긴다,,

수금을 전문적으로 했던 그 파라과이 직원인 길레르모 는 점점 정확한 수금 액수를 가져오지 못했다,

처음엔 나도 계산을 정확히 자주 했지만, 점점 어느 순간부터 정확한 수금 액수에 대한 개념이 없어진다,

막연히 가져오면 그게 다인 것처럼,,, 사실 조금씩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귀천함을 느끼게 되고,,

나는 수금한 그 금액에 대해서는 계산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가 된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낸 직원의 신고가 있었다,

결국 그는 그동안 많은 돈을 뛰어 먹은 샘이 되었고 심각한 분위기 속에 그 직원을 해고하고 말았다,

그가 뛰어 먹은 돈은 어림잡아 3~4만 불 정도 추측이 되지만 확실한 금액은 아직도 모르고 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한다,

길레르모는 한 달 정도 후에 검찰과 경찰들을 데리고 나의 공장에 들이닥치는데 그 이유는 그 공장의

모든 원액 기계들은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각종 서류를 검토해보니까,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경찰들을 데리고 올만 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각종 원액을 샀고 브라질에서는 각종 샴푸 병을 샀다,

샀을 때 나는 길레르모에게 돈을 주고 직접 사서 오라고 했는데 당시 파라과이는 정식 수입이 없는

무관세의 나라였기에 직접 사람이 가서 가지고 들어 와도 괜찮은 나라였다,,

파라과이에서 장사하는 대부분 사람은 직접 이웃 나라로 들락거리면서 직접 물건들을 해오던 시기였고

그것이 훨씬 편한 곳이 바로 당시의 파라과이었다

그때 아르헨티나에서 물건을 직접 산 사람의 이름을 영수증에 기재 하는데,

그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 바로 길레르모 였다,

당연히 각종 모든 영수증에서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이유를 가지고 파라과이 검찰에 신고한 것이다,

난 어떤 증거를 들이 돼도 그 상황은 쉽게 수습할 수가 없었다,

그런 곳이 파라과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그리 당한 것이었고,,

나처럼 당한 사람들은 나 말고도 많이 있을 거라 본다,

파라과이가 무서워졌다,,

그들이 싫증이 나고 그곳이 싫었다,

1988년부터 약 3년간,, 잘 나가던 나의 샴푸 공장은 법정에 의해 문을 닫고 만다,

지루하게 1년 넘게 펼쳐진 법정 공방이 있었지만

나에게 주어진 결과는 일단 해결이 될 때까지 문을 닫으라는 판결이 우선 떨어졌고,,,

1989년 8월 즈음에 파라과이에서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그 이후의 새로운 정권의 법 집행은

이민자들에게 더욱 불리한 결과들만이 내려지던 시기였다,

나는 공장을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다,

배심원도 참석한 정식 재판은 법정에 들어가기도 수십 번,,

여러 명의 변호사도 고용했지만 결국 모아둔 돈도 1년 정도에 많이 쓰였고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20대는 이렇게 파라과이에서 마지막 추억을 남기고 말았다,,

1991년 4월에 결혼하고 신혼여행을 미국으로 온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았다,

나와 와이프는 파라과이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 살아보기로 한다,,

파라과이에서는 각종 이민 영주권을 쉽게 구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그리 호락 하지 않은 나라였다,

불법체류자 신세로 살아가야 하는 고난의 시작이 다시 나에게 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