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이야기 56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페니쉬를 사용하며 탱고가 탄생한 도시다 아르헨티나의 인구 3분의 1인 약 1500만 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남미에서 최고로 큰 도시이며 항구도시이다, 가톨릭 국가처럼 보이지만 도시 안에서는 수많은 종교들이 활성화 되는것을 거리를 걷다보면 금방 알수있는 곳 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지명은 에스파냐어로 ‘좋은 공기(바람)’이란 뜻이며 이탈리아의 어느 교회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연중 비가 꾸준히 오는 약간 습한 느낌을 받는 기후이다 유럽의 파리라는 애칭을 받을 정도로 도시가 이쁘며 예술의 도시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24개의 프로 축구 구단이 있는 도시이며 세계에서도 가장 많은 극장가가 몰려있는 것으로 유명한 거리가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다, 다른 남미 국가를 다닐 때와는 전혀 다른..

수리남에도 박물관이 있었다

Nieuw-Amsterdam 박물관은 수리남과 Commewijne 강의 합류 지점에 있어 있으며 파라마리보에서 자가용으로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수리남에서 발굴된 여러 역사적인 정보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수리남에서 야외 박물관으로서는 최초의 것이며 네덜란드와 수리남의 합작으로 만들어졌다 대중에게 개방되고 있는 박물관으로는 그 규모가 수리남에서 가장 크다., 1747년 원래는 수리남을 다른 나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요새로 지어진 것이었으나 여러 과정을 거쳐 1863년과 1967년 사이에 이 요새가 이 나라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개 보수를 거쳐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네덜란드의 식민지였기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아오는 이곳이 유일하게 수리남 정부에서 유럽사람들에게 가장 많..

수리남에도 한국 식당이 있다니...

수리남 파라마리보에도 교포들이 살고 있고 이들 교포 대부분은 배를 탔던 선원들로 우연히 이곳에 들려 정착하기 시작했던 사람들이었다, 많게는 200여 명까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약 50여 명밖에는 없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을 하고 5년 내외로 전부 이웃 나라로 그리고 한국, 미국등의 나라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곳 한인 식당을 운영하는 이 씨네 가족은 이곳에 40년이나 넘게 살고 있고 식당도 대를 이어 33년을 넘게 운영하고 있다, 지금도 그 자리 그 맛 그대로 변함없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고 이곳 사회에서 꽤 이름이 나 있는 식당으로 자리 잡았다, 주소 Mahonylaan 12 paramaribo Surinam Tel:597-479834 갑자기 생각이 나서 식당 밖의 보습을 몇 장 찍었지만, 내부의 모습은..

수리남의 저수지와 검은 호수

북동쪽에 브로코폰도 저수지(Brokopondo Reservoir)가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물이 많은 저수지 댐 이며 저수지 면적도 세계에서 제일 크다, 1964년 브로코폰도 프로젝트에 의해 댐이 만들어졌고 수력발전을 하게 되었다. 현재 수리남에서 사용하는 전체 전기의 75%를 생산한다. 이 저수지는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수리남을 가로지르는 Afobaka라고 하는 이름의 강을 막아 건설하였다. 댐의 높이는 54m이며 댐을 돌아가면 작은 마을이 근처에 있다, 저수지는 1965년에 가동되었지만 1971년까지는 최적의 수위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댐의 넓은 면적으로 인해 그 안에 살고 있었던 약 5,000명의 주민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야 하는 수난도 겪는다, 댐이 만들어 졌을 때 주위의 자연환경과 사람들..

수리남의 수도 파라마리보 구경하기

수리남(Republiek Suriname)은 남아메리카에 있는 독립국이다, 남쪽으로는 브라질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프랑스령 기아나, 서쪽으로는 가이나와 맞닿아있다, 1975년 11월 25일에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였다 수도는 파라마리보다 전 국토의 80%가 밀림지역이며 금이나 보크사이트 같은 광산자원이 풍부하다. 기후는 열대 기후이며 일 년 내내 온도 차가 거의 나지 않아서 사실상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주민은 인도계가 37%, 크리올(백인과 흑인의 혼혈)이 31%, 인도네시아계가 15%, 아프리카계가 10%, 나머지는 선주민이나 화교 등이다. 주 언어는 공용어가 네덜란드어이지만 영어, 에스파냐어, 포르투갈어도 사용된다. 수리남 파라마리보 국제공항에 도착을 한 시간은 저녁 (새벽)1시가 넘어서였..

페루여행 마추픽추

남미를 생각 할 때 가장 생각나는 여행지는 과연 어딜까? 아마도 마추픽추가 아닐까? 남미의 심장 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마추픽추를 찾아봤다 리마에서 쿠스코까지는 비행기를 타고 와서 하루를 보낸 후 기차를 타고 산 아래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고불탕 거리를 한참을 달린 후에 다시 한참을 걸어서 올라 가야한다, 이렇게 긴 여정끝에 드디어 마추픽추에 올 수 있었다, 이곳 마추픽추까지 오려면 비행기, 기차, 버스,등산은 필수인 것 같다, 오는 과정이 힘이 들어서 그런지 막상 오고 나서 제일 먼저 찾은 것은 시원한 음료수였다, 멎진 장면이고 뭐고,, 힘들어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추수리고 갈래야 했다, 유창한 영어와 스페니쉬를 쓰는 페루인 가이드는 나 말고 쿠스코에서 모은 약 20여 명의 사람들과 같이했다, 인종도 ..

페루여행 쿠스코의 태양절 축제

마추픽추를 올라가는 길에 쿠스코(Cusco)라는 도시를 거쳐야 한다, 마침 이곳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10일 연속 벌어지는 축제에서 오늘이 7일째라 한다.. 쿠스코(Cusco)는 페루 남동부 쿠스코 주에 있는 도시이다. 80 km 북서쪽으로 마추 픽추가 있으며, 안데스 산맥 사이의 해발 3600m에 있다. 현재 인구는 약 50만명이다.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하고 타완팅수유(Tawantinsuyu, 잉카 제국의 정식 명칭)의 수도이며, 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도 페루에서 가장 유수한 도시 중의 하나이다. 쿠스코의 중앙광장인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리마에서 새벽 비행기를 타고 쿠스코에 도착했기에, 여전히 오전이었다 새벽 일찍의 쿠스코는 생기가 넘쳤다, 그러나 높은 산꼭..

페루여행 부촌과 빈민촌

페루는 이번이 두 번째다 정확히 말하면 페루의 수도 리마를 밟은 것은 이번이 첫 번째지만 페루 국경을 넘어서 페루땅을 밟은 것은 두 번째다, 1996년 미국에 이민 와서 처음으로 해외로 배낭을 꾸려 나갔던 곳이 칠레였다, 남미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에 칠레의 긴 나라를 남북으로 버스를 이용해 여행을 해보고 오겠노라 굳은 결심을 하고 떠나겐 된 곳이 남미 중에 칠레였다, , 이상하게 길고 긴 나라 , 그곳에는 어떤 사람. 바닷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오로지 호기심에 의한 배낭여행이었다, 그때 칠레의 북쪽 도시인 이끼캐(Iquique)라는 도시를 간 적이 있었는데 이 도시를 간 이유는 보세지역이라는 특수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페루사람들이 많이 와서 관광을 하는 것이 보였는데 이때도 즉흥적으로 ..

또 다른 남미여행을 계획하는 중에

남미를 여행하고 얼마후에 그곳에서 있었던 많은 장면들이 생각이 났다,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여행지도 가봤지만 지금도 역시 남미의 여행이 더욱 생각이 난다, 유럽과 아시아 쪽 많은 여행지엔 가이드가 있었고 차량도 준비되었고 먹을 거 볼 것들이 만들어져 있었던 여행이었지만 남미에서의 여행은 잠잘 곳과 볼거리등,전부 내가 만들어가야 했다, 꼭 미지의 세상을 개척해 나간다는 기분도 들었던 여행이다, 그리고 실지로 뭔가 있을만한 곳으로의 여행을 했다, 중요한 것은 여행을 하면 할수록 용기를 얻었고 진정한 남미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리고 끝없는 배낭을 짊어지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여행에 대해 비로소 중독이 된 거 같았다, 그것을 이번 남미여행에서 얻은 것이다, 진정한 여행의 중독성을,, 가장 중요했던 것은 호텔..

베네수엘라 의 마지막날 밤과 차베스 대통령

베네수엘라의 공항을 나올 때 환전소에서 바꾸어야 했던 환율은 1불당 4000볼리바르 였다 정부 공시 가격이 그랬다, 쿠마나의 한국 사람의 도움으로 일반 중국 마켓에서 바꾸었더니 12.000볼리바르 였으며 흥정을 하면 더 올라 갈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미리 알았으면 공항에서 바꾸지 말고 왔어야 했는데 정보가 없었던것이 안타까웠고 다음 여행에서부터는 암시장의 환률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말가리타의 내가 묶었던 호텔 바로 앞에는 택시 기사들이 많게는 10명 적게는 3명 정도 항상 대기 상태로 손님의 콜 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과 같이 한가롭게 앉아서 예기을 하곤 했다, 그들과의 대화의 계기는 택시를 타고 다니면서 얼굴을 익힌 상태였지만 그러면서도 근처를 지나 갈 때면 항상..